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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우이독경(牛耳讀經), 마이동풍(馬耳東風)”이란

 

장님이 꽃을 잘 설명했다고 해도, 그 장님은 꽃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 눈 뜬 사람으로부터 꽃 설명을 듣고 기억하여 안 것이다. 

즉, 눈뜬 사람은 꽃을 보면서 계속 꽃에 대하여 더 많이 알 수 있다. 그러나 장님은 설명들은 것만을 알 수 있다.

 

진리도 마찬가지이다.
혜안이 열린 사람은 결과를 보고 더 나아가 원인까지 알 수 있다. 

그러나 진리의 장님인 혜안을 뜨지 않은 사람은 배운 결과만 알지 원인은 알 수 없다.

 

또한 장님은 잘못 배워서 잘못 알았어도 그 오답을 고칠 수 없고 오히려 그 잘못 안 것을 잘 안 것으로 하기 위하여 

또 다른 거짓을 사실로 만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. 

그러나 눈 뜬 사람은 그런 바보짓을 할 이유가 없다.

 

“우이독경(牛耳讀經)”이란 말이 있다.
소에게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뜻으로 당연한 말이다.
 

그런데 따지고 보면, 소는 진리를 설명하는 말은 모르지만, 오히려 진리는 알 수 있다. 

진실한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해서도 아니 된다. 왜냐하면, 장님에게 꽃 설명을 했다고 장님이 꽃을 아는 것이 아니고 

오히려 꽃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 많은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. 

그렇게 만든 오해가 인간을 조직으로 묶어 수많은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.
진리를 설명한 혜안을 떴다는 사람들이 만든 모든 경, 성경들이 소귀에 경 읽기인 것처럼, 

장님에게 꽃을 설명하며 잘난 척하여 장님들이 진리를 보는 혜안을 뜨는 일을 더 방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. 

그래서 진리를 전하는 종교 속에 존재하는 소귀에 경 읽는 사람들이 진리에서 더 멀리 떨어졌고, 경을 듣지 않은 소들, 그 소리가 필요치 않는 사람들 속에서 각자(覺者), 현자(賢者)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도 진리대로 잘 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.

 

마이동풍(馬耳東風)이란 말도, 
말은 동풍이 불면 봄이 오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.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이다. 

 

사람들 중에서 동풍이 불어도 봄이 오는 줄 모르는 진리의 장님이 더 많고 오히려 말들 중에 야생말들은 모두 동풍의 의미를 잘 안다. 

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말이 진리의 장님처럼 모를 뿐이다.

 

혜안을 뜨거나, 동풍의 뜻을 아는 귀를 여는 방법은 

남으로부터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,

스스로 그 귀와 눈이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알고 

목숨걸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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